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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otten Realm

행복반 《Forgotten Realm》, 2024.8.23.-9.12., 전시공간, 서울
전시 서문

The pleasure in drawing
전시제목이 시사하듯 이 ‘잊혀진 영역(Forgotten Realm)’은 완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음을 암시한다. 완성된 이미지 아래 가려진 밑그림, 두터운 물감에 의해 사라진 연필 자국.

이 잊혀진 영역에서 사라진 것은 비단 연필 선뿐이었을까.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종이는 그것의 흔적을 온전히 담고 있다. 메마른 붓질이 종이를 긁어내듯 드로잉은 어떤 과정의 일부 혹은 전체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완성을 위한 드로잉은 여러 번의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완성된’ 작품에 가려지고 이내 잊혀 진다. 어느 순간부터 드로잉은 작업을 위한 밑그림, 아이디어 스케치나 초안, 작품 구상을 위한 에스키스, 완성에 선행하는 행위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드로잉의 역할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인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드로잉이 지닌 존재론적 위상을 간과하곤 한다. 잊혀진 영역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긴 역사에서 인류가 가장 먼저 무엇을 시도했는지 생각해보자. 불에 탄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동물의 피를 재료 삼아, 꽃잎과 나뭇잎을 짓이겨서, 흙과 돌을 사용하여 동굴의 벽면이나 땅, 거대한 돌의 표면에 무언가를 새기는 것. 혹은 유년기의 가장 오래된 그림의 기억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다. 이는 종종 인간이 지닌 기록에 대한 본능이자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의 발현으로 거론된다. 이것들은 겹겹이 색을 올려 바르고 명암으로 사물을 또렷하게 표현한 풍경이나 초상이 아니었다. 조각이나 건축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주 간단한 선으로 시작하여 일상의 어떤 순간을 남기는 것, 혹은 그때그때의 생각이나 감정을 남기는 것. 드로잉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장-뤽 낭시는 『드로잉에서의 즐거움』(The Pleasure In Drawing , 2013)에서 드로잉의 존재론적 의미를 다시금 상기한다. 낭시에게 예술은 이 세계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세계에 ‘도래하는 사건’으로, 드로잉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대상을 시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직 어떤 형식도 주어지지 않은 사물의 드러남이다. 드로잉은 사물,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붓 혹은 연필이 캔버스나 종이에 맞닿는 지점으로부터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그 순간의 망각 사이, 눈과 손, 그리고 인식의 시간차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틈새. 드로잉은 그 틈새를 비집고 헤쳐 나온다. 선(line)이 지닌 욕망,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자하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드로잉모임 ‘행복반’의 작가들은 서로 각자 다른 이유로 모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은연중에 어떤 공통적인 지점을 향해 있다. 작업을 꾸준히 지속하고자하는 바람과 현재 작가로 활동하며 느끼는 불안과 약간의 외로움, 이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 드로잉이 촉매가 되어 이들은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각자 드로잉에서의 즐거움을 찾아간다.

“(드로잉은) 존재하는 것 자체를 스케치하는 것이다. … 그것은 그 드로잉의 존재 자체를 형식에 열어 젖혀 떠오르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누구도 이 욕망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 욕망은 존재를 바깥으로 향하게 하는 욕망으로서 그 자신을 열어젖히는 욕망이다.”1)

글. 이슬비(독립큐레이터, 미학관 디렉터)

  1. Jean Luc Nancy, The Pleasure in Drawing , trans. Philip Armstrong, 2013. p.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