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artart.wiki

모크캠프/설치 기록/박주연, 윤여진, 최지음의 대화

박주연, 윤여진, 최지음의 대화

모크캠프의 단체 설치 2회차 기간에 박주연, 윤여진, 최지음이 나눈 대화의 기록.

대화록

                                  윤여진
                            물질이 스스로 하는 일
                                 최소 개입
                                    ▲
                                   / \
                                  /   \
                                 /     \
                                /       \
                               /   작가는  \
                              /   어디까지   \
                             /   개입하는가?  \
                            /                \
                           ●──────────────────●
                        최지음                박주연
                   흔적을 받아들이기        현실을 재구성하기
                     기억 / 접촉         연출 / 은유 / 환경

주연 (00:55)
그럼 우리 셋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나눌까요, 아니면 여기 설치된 작업들을 전체적으로 다 같이 둘러보면서 이야기할까요?
지음 (01:07)
우리 셋의 작업에 집중해서 더 깊숙하게 이야기해 볼지, 아니면 전체 설치 공간을 아우르며 이야기할지의 이야기 인 거죠?
주연 (01:25)
전체 설치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작가가 없는 상태에서 제3자의 시선으로 작품을 보고 나눌 수 있는 감상들이 있잖아요. 나중에 다른 동료들에게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 나눈 피드백을 공유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오늘 대화를 어느 선까지 다룰지 정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여진 (01:55)
그럼 일단 우리 세 사람의 작업 이야기를 먼저 나눠보고, 시간이 남으면 다른 분들 작업도 이야기해 봐요.
지음 (02:06)
좋아요. 사전 내용이나 배경지식은 최대한 배제하고, 표면적으로 보이는 감각을 중심으로 두 사람이 한 사람의 작업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방식으로 해봐요.
주연 (02:35)
여진 님 작업은 딱 봤을 때 무언가에 ‘기대어 서 있다’는 태도가 정말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세 장의 판이 서로를 지탱하며 기대어 있고, 저쪽에 설치된 작업도 벽이나 바닥에 단단히 고정된 게 아니라 어떤 미묘한 지점에 무게중심 실처럼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서 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주연 (03:47)
그리고 표면이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 껍질을 뜯어낸 듯한 흔적으로 느껴져요. 전체를 균일하게 다 뜯어낸 게 아니라, 어떤 부분만 부분적으로 뜯어내기도 하고 전체를 다 벗겨내기도 하면서 힘의 강도를 조절한 거 같아요.
지음 (05:00)
저는 이 작업을 처음 봤을 때, 가공된 합판이라기보다는 커다란 고목의 나무가 그대로 이곳에 놓여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먼저 받았어요.
지음 (05:31)
틈이 벌어진 틈새로 안쪽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겉면과 달리 안쪽은 굉장히 매끄러운 면이 드러나더라고요. 겉면이 어딘가에 강하게 부착되어 있다가 뜯겨 나간 듯한 과정이 고스란히 읽혔어요.
지음 (06:04)
그런데 이렇게 구부러지는 곡면과 형태가 여진 님이 의도한 대로 정확히 나오는 건지 궁금해요. 조각마다 휘어 있는 상태가 다 다르잖아요. 재료 자체가 가진 고유한 장력과 힘에 의해 자연스럽게 휘어지는 건지, 아니면 여진 님이 작업 과정에서 어느 정도 힘을 조율하며 형태를 만들어가는 건지 계속 궁금했어요.
여진 (06:43)
제가 작업할 때 손으로 가하는 힘의 세기와 뜯어내는 방식, 그리고 합판의 상태에 따라 구부러지는 각도나 방향이 완전히 달라져요. 예를 들어 표면을 뜯어내듯 힘을 주면 동그랗게 말려 들어가고, 덜 뜯어내면 상대적으로 평평함을 유지해요. 많이 뜯어낼수록 더 깊게 휘어지고요.
저 작업 같은 경우에는 한 면 전체를 일정한 힘으로 균일하게 벗겨냈어요. 그러면 이리저리 뒤틀리지 않고 일정한 장력을 유지하면서 팽팽하게 구부러지려는 힘을 머금게 되거든요.
결국 제 신체적 노동과 움직임이 작업 표면에 서로 다른 장력으로 드러나는 셈인데, 어느 정도 결과를 예상하며 작업하긴 하지만 결코 제 뜻대로만 나오지는 않아요. 접착제가 강하게 굳어 도저히 안 뜯어지는 부분도 있고, 합판이 예상보다 너무 많이 뜯겨 나가는 부분도 있거든요.
여진 (08:07)
합판이 결대로 너무 뜯겨 나가면 제가 아무리 둥글게 말려고 해도 형태가 잡히지 않아요. 습도에도 영향을 정말 많이 받아서, 작업실에서 제습기를 돌렸을 때는 바짝 오그라들어 있다가도 전시장에 가져와 습기를 머금으면 다시 퉁퉁 불어나며 형태가 풀어지기도 하고요. 모든 걸 제 의도대로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 재료의 성질과 제 의도 사이의 균형점을 계속 조율해 나가는 과정이에요.
여진 (10:28)
실제로 합판을 세 종류 정도 섞어서 사용하는데, 종류마다 표면을 벗겨냈을 때 휘어지는 방향과 내부 구조가 다 달라요. 제가 힘을 쓰는 방식과 합판의 고유한 결이 맞물리면서 대여섯 가지에서 일곱 가지 정도의 휘어지는 패턴들이 만들어지죠.
지음 (10:58)
여진 님을 직접 만나기 전에 인스타그램을 통해 LDK에서 하셨던 작업을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요. 그때는 유리섬유나 재료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상태였지만, 하얀 물질이 흘러내리다 어느 한순간에 굳어 멈춰 있는 작업과 지금의 작업을 보면서 공통적인 태도가 느껴졌어요.
작업의 서사 이전에, 재료를 선택하고 다루는 방식에서 무언가 흐르고 있거나 변화하는 어떤 상태 자체에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신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지음 (12:28)
그래서 그 조율의 과정이 무척 궁금했어요. 재료가 스스로 형태를 멈추는 순간과 작가로서 개입하는 순간 사이에서, 여진 님과 물질이 어떻게 대화하며 그 멈춤을 조율해내는지요. 완벽히 통제할 수 없는 물질의 영역과 작가의 손길이 만나는 지점이 지금 작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 같아요.
주연 (13:08)
기계적으로 정교하게 박리된 면이 있는가 하면, 사람 손의 거친 악력과 물리적인 힘이 고스란히 묻어난 부분도 공존하잖아요. 방금 말씀하신 대여섯 가지 패턴이라는 것도, 본래 자연물이었던 나무를 인공적인 판재로 가공하면서 부여된 구조적 조건들이 풀려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냥 날것의 통나무였다면 깎아내는 방식에 따라 훨씬 더 자유롭게 뒤틀렸을 텐데, 이미 접착제와 강한 압력을 받아 규격화된 합판에 작가의 외력이 다시 더해지면서 제한된 몇 가지 패턴으로 도출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 재료의 물성을 어떻게 계산하고 활용하시는지도 궁금해요.
여진 (14:49)
재료를 선택하고 조형해 나가는 과정에서 저 스스로 엄격하게 지키는 룰이 있어요.
예를 들어 예전에 실과 석고를 이용해 세우는 작업을 했을 때, 실의 꼬임 구조에 주목했어요. 실의 원사를 뽑아 새끼줄처럼 꼴 때는 2의 배수로만 이루어지거든요. 2, 4, 8, 16, 32가닥으로 꼬여야만 꼬임의 장력이 생겨요. 그래서 그 작업에서도 실의 개수를 철저히 2의 배수로 설정했죠. 그리고 석고물을 한 번 적신 뒤에는 손을 떼고 제 개입을 끝내요. 그 이후에는 석고가 굳고 중력의 힘을 받으면서 실이 늘어나 스스로 휘어지는 거예요. 제가 억지로 구부린 게 아니죠.
여진 (16:06)
물질이 중력과 장력에 반응하는 힘에 맞춰 스스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최소한의 위치만 잡아줄 뿐, 그 외에 인위적인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어요.
이 합판 작업도 마찬가지예요. 합판의 겉면을 벗겨내서 ‘인공적인 합판’처럼 보이기도 하고, 원래의 ‘거친 원목’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모호한 중간의 상태를 의도하며 깎아내요. 저 맨 위의 조각은 속살이 너무 많이 드러나서 거의 원목 나무처럼 보이잖아요. 반대로 아래쪽 조각들은 합판 특유의 가공된 층위가 더 드러나도록 선택했고요. 첫날 설치할 때도 “어떤 게 더 합판 같아 보이고, 어떤 게 더 나무 같아 보여?”라고 질문을 던지며 균형을 맞췄던 이유가 바로 그 기준 때문이었어요.
여진 (17:29)
제 작업은 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준이 서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해요. 실과 석고 작업에서도 두 물질이 서로의 역할을 맞바꾸며 대등하게 존재하길 바랐거든요. 물질 간의 ‘위계 없음’이 핵심이었어요. 실은 실 본연의 꼬임과 장력을 유지해야 하고, 석고는 보강재를 일절 넣지 않고 부러지면 부러지는 대로 물질의 한계를 온전히 드러내야 했죠. 대신 실이 그 연약한 유연함을 지탱해 주면서 서로 보완하는 수평적 관계를 설정했던 거예요.
합판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테스트를 거쳤어요. 평평해서 휘지 않는 일반 합판, 가로(요꼬) 방향으로 결이 꺾이는 합판, 세로(다데) 방향으로 휘는 합판 이렇게 세 가지를 다루다 보니 결의 접착 방향과 제 손의 힘이 맞물려 대여섯 가지의 고유한 패턴들이 나오게 된 거예요.
여진 (19:32)
보통 작업을 할 때 재료 본연의 물성을 깊이 파고들되, 제가 개입하는 지점은 딱 필요한 최소한에 그치려고 해요.
여진 (19:56)
예전에 선생님께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저는 원래 이미지나 내러티브를 작업에 잘 활용하지 못했어요. 수업 중에 테스트 삼아 영상 작업을 해본 적도 있는데, 사실 이야기 구조를 짜고 이미지를 콜라주하는 건 마음만 먹으면 훨씬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하지만 입체 조각을 하면서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을 손으로 만지다 보면, 물질이 지닌 고유한 물리적 법칙과 특성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 성질을 알면 알수록 호기심이 커지고, 결국 어떤 대상을 재현하거나 관념을 은유하기 위한 도구로 재료를 쓰지 않게 돼요. 오직 순수한 물성 그 자체로 다루게 되는 거죠.
여진 (21:19)
제 작업을 보고 ‘사물을 의인화한다’고 해석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저는 대상을 의인화할 의도가 전혀 없어요. 제가 인간의 언어로 말하다 보니 그렇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최대한 상징이나 비유를 배제하고 제 자신을 대입하지도 않으려 해요. 그렇게 대입하는 순간 사물을 인간 중심적으로 대상화해 버리는 것 같거든요. 물론 물질의 층위와 언어의 층위를 명확히 분리한다면 비유적 표현을 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철저히 물질성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지음 (22:15)
각 재료가 가진 물성이 다 다를 텐데도, 그것들을 대하는 여진 님의 태도는 언제나 명확하고 일관되네요. ‘내가 이 물질을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는 태도가 시각적인 결과물로 고스란히 드러나서 참 좋아요.
여진 (22:45)
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런 방식을 고수해 온 것 같아요.
지음 (22:53)
물질이 작가의 손을 떠나 스스로 균형을 잡고 놓여 있을 때, 시각적인 완성도나 기울기를 내 의도대로 조금 더 매만지고 통제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법도 한데요.
여진 (23:17)
그런 유혹이 들 때도 있죠. 예전에 속초에서 작업할 때는 사실 약간의 무리수가 있었어요. 제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필요한 만큼만 깎아내야 하는데, 공간을 구성하려다 보니 전시장 규모는 너무 크고 조각의 수량은 부족했던 거예요. 그러다 보니 “조금만 더 둥글게 휘어져라” 하면서 제 손으로 억지로 형태를 더 구부려 놓기도 했죠. 그 미세한 억지스러움이 제 눈에는 고스란히 보이더라고요.
여진 (24:31)
그 인위적인 느낌이 미묘하게 거슬렸어요. 만약 속초에 다시 가서 작업한다면 공간 전체의 구조를 머릿속에 정밀하게 계산해 두고,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적정선을 찾아 깎아서 가져갈 거예요. 처음에는 현장에 가서 어떻게든 요리조리 놓아보자는 마음이었다면, 이제는 적정선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불필요한 형태들을 덜어내게 돼요. 그래서 예전 속초 작업에 비해 지금 작업들이 훨씬 미니멀해진 거고요. 휘어지는 긴장감 딱 하나에만 온전히 집중하게 만드는 거죠.
주연 (25:57)
작업실에서 제습을 거친 뒤 이곳 전시장에 왔을 때 환경에 따라 형태가 변하잖아요. 그렇게 달라진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자체가 작가님이 추구하는 태도인 거군요.
여진 (26:15)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영역이니까요. 억지로 통제하려 해도 되지 않으니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예전에 학교에서 장마철에 작업할 때는 아예 형태가 잡히지 않았어요. 습기를 잔뜩 머금어서 전혀 휘어지지도 않고, 탄성이 너무 좋아져서 바닥에 넘어져도 부러지지도 않더라고요. 그런 경험을 겪으며 작업이 주변 환경과 날씨에 깊이 연동되어 있다는 걸 절감했어요.
합판도 아니고 통나무도 아닌 상태를 만들고 싶다는 것도,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고정되지 않은 유동적인 상태’를 조형적으로 붙잡아두고 싶기 때문이에요.
주연 (27:50)
저렇게 3단으로 높게 쌓아 올린 것은 기둥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나요?
여진 (28:05)
나무 기둥인 척, 혹은 이 전시 공간에 원래부터 존재했던 구조물인 척 서 있게 하고 싶었어요. 천장 끝까지 닿을 듯한 높이와 규모감으로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면 겉으로는 굉장히 육중하고 견고해 보이잖아요. 하지만 안쪽은 텅 비어 있죠. 그 양가적인 모순이 어딘가 ‘뻔뻔하다’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이 작업의 제목을 〈Square bridege(뻔뻔함)〉으로 붙였던 거예요. 속은 한없이 연약하면서도 겉으로는 당당하고 강인한 척 서 있는 그 대비가 재미있었거든요.
지음 (29:26)
제작 과정이나 설치 단계에서의 선택들을 들어보면, 여진 님은 항상 양극단 사이에서 ‘중간 지점’을 치열하게 찾아가시는 것 같아요. 명확함과 명확함 사이에 존재하는 모호한 틈새를 찾아가는 과정처럼 느껴져요.
여진 (30:00)
맞아요. 대상도 아니고 배경도 아닌 경계의 상태를 만들고 싶었어요. 벽에 걸면 평면 회화처럼 읽히고, 바닥에 내려놓으면 입체 조각처럼 읽히는데 그 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지점을 찾고 싶었죠. 벽에 걸린 다른 평면 작업들과 함께 놓이면 필연적으로 위계가 생기잖아요. 어느 하나가 배경이 되거나 대상이 되어버리니까요. 그 위계를 허물기 위해 위치를 수없이 바꿔본 끝에, 지금처럼 모서리를 차지하는 형태가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했어요.
지음 (30:58)
수직도 아니고 수평도 아닌 모호한 각도를 취하고 있네요. 개인 설치 작업을 하실 때도 공간에 놓인 오브제들이 서로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를 맺기를 바라는 태도가 느껴져요.
여진 (31:16)
처음에는 작업 간의 위계 없는 관계를 고민했는데, 선생님께서 “작업 뒤에 다른 작업이 놓이면 자연스럽게 대상과 배경의 구조로 보일 수밖에 없다. 차라리 이 작업 자체의 내부에서 그 지점을 증명하는 게 훨씬 설득력 있다”고 조언해 주셨어요. 모서리를 점유하게 되면서 그 기묘한 경계성이 더 잘 살아난 것 같아요.
그리고 특정 이미지를 연상시키지 않는 것도 중요했어요. 한 번은 길게 펼쳐 설치해 본 적이 있는데 시각적으로는 아주 멋졌지만 너무 ‘파도’처럼 보이는 거예요. 구체적인 형상이 연상되는 순간 또 다른 대상이 되어버리니까, 제 의도와는 맞지 않다고 판단해서 걷어냈죠.
주연 (32:38)
파도처럼 보이는 것과 기둥이나 나무처럼 보이도록 의도하는 건 여진님 기준에서 서로 다른 차원인 거군요.
여진 (32:51)
네, 그래서 벽과 바닥에 걸쳐진 작업은 〈Square bridge(벽과 바닥)〉이고, 저 기둥 작업은 〈Square bridge(뻔뻔함)〉이라는 부제를 갖게 됐어요.
지음 (32:59)
설명을 듣고 보니까 정말 기둥이 뻔뻔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여요. (웃음)
여진 (33:04)
굉장히 늠름하고 당당한 척하고 있지만 속은 텅 비어 있으니까요.
주연 (33:12)
뭔가 현령 님의 작업은 겉보기에 연약해 보이지만 물리적으로는 단단하고 강인하다면, 여진님 작업은 외적으로 강인해 보이지만 물리적으로는 아슬아슬하고 연약한 거 같아요. 운명의 짝대기로 이어진 두 분이 서로의 ‘안전장치’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고요.
여진 (34:51)
원래는 별도의 지지대나 안전장치 없이 자립시키는 방식이었어요. 기온과 습도가 완벽한 봄날에는 5~6시간만 작업해도 자연스럽게 꼿꼿이 서거든요. 하지만 이번 전시장에서는 환경적 제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지해 줄 보조 장치가 필요했고, 그렇게 들어온 게 저 로프 안전장치예요.
결과적으로는 저 안전장치라는 물리적 요소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실마리가 되어주었어요. 안전장치를 단순한 보조 도구가 아니라 조형적 언어로 끌어들여, 기둥 작업과 동등한 위계를 가진 요소로 다뤄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발견했거든요.
주연 (36:16)
그럼 다른 작가(현령 님)의 작업이 내 작업의 안전장치 역할을 하게 된 상황도 개념적으로 납득이 되시나요?
여진 (36:24)
네, 저 줄은 현령 님의 작업 요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 작업의 일부이기도 해요. 하나의 줄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셈이죠. 혹시라도 작업이 건드려져 쓰러질까 봐 한 번 더 감아 묶었는데, 이어져 있으면서도 각자의 영역으로 분리되는 관계성을 보여줘요.
예전에는 극도의 긴장감을 주기 위해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주 얇은 와이어를 썼는데, 두께감이 있는 로프를 써보니 시각적으로도 재미있고 다른 사물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로프를 고를 때도 색상이나 묶는 형태를 세심하게 신경 쓰며 설치했습니다.
주연 (37:37)
그전에는 가는 와이어를 사용하셨는데, 이번에는 두께감과 존재감이 확 드러나는 소재가 들어와서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선택의 배경이 궁금했는데 그랬군요.
여진 (38:03)
현령 님은 노란색이 산업 현장에서 ‘안전’을 상징하는 시그널 색상이니 조형적으로 어울릴 것 같다고 제안해 주셨어요. 저는 스테인리스 스틸의 단단하고 차가운 느낌과 노란 로프의 다소 조악한 인공성이 대비되면서, 튼튼하면서도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역설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요.
여진 (38:54)
우리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 볼까요?
주연 (38:58)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바로 옆에 지음님 작업으로 넘어가는 거 어떨까요?
지음 (39:18)
우리는 수업을 같이 들어서 서로의 작업 배경을 어느 정도 알고 있잖아요.
주연 (39:28)
그래도 완전히 다 아는 건 아니니까, 처음 보는 것처럼 모른 척하고 감상해 볼까요..?
이쪽 표면을 먼저 보면 흙이나 작은 돌 같은 실제 자연 물질들이 엉겨 붙어 있는 게 보여요.
여진 (39:58)
저는 바닥에서 흙을 떠내게 된 구체적인 과정이 궁금했어요. 마지막에 작업을 바닥에 눕혀서 설치하셨잖아요. 원래는 이걸 수직으로 세우는 행위 자체에 핵심적인 의미를 두고 계셨는데, 막상 바닥에 눕혀보셨을 때 어떤 감각이 드셨는지 궁금해요.
지음 (40:18)
개인 설치 마지막 날 주연 언니가 “이것도 한번 시도해 보자”면서 바닥에 눕혀봤거든요.
지음 (40:35)
원래는 벽에 기대어 수직으로 세우는 행위 자체에 작업의 중심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제작했던 거였어요. 그런데 주변 공간을 완전히 비워내고 바닥에 낮게 눕혀놓고 보니, 오히려 ‘땅’이라는 고유한 장소성이 훨씬 더 직관적이고 강력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조각들이 제각각 깨져 있는 형태인데, 그 갈라진 파편들을 바닥에서 퍼즐처럼 이어 맞추다 보니까 ‘실제 외부의 땅을 한 조각 그대로 떠왔다, 그 땅을 이 전시 공간으로 직접 데리고 들어왔다’는 실재감이 훨씬 더 생생하게 전해졌어요.

여진 (41:23)
그랬던 것 같아. 그런데 왜 이번 단체전에서는 다시 세우기로 한 거에요?
지음 (41:32)
그래서 그 고민을 계속하게 돼요. 맥락적으로 취해야 하는, 계획한 설치 방식이 있는 반면, 현장에 직접 와서 계획에 없던 시도를 해보았을 때 느껴지는 생생함이 있잖아요. 눕혔을 때 ‘이게 훨씬 더 땅 처럼 느껴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사이에서 제가 무엇을 더 고집해야 할지 좀 혼란스럽더라고요.
사실 요즘은 시각적인 결과물에만 매몰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중이에요. 아까 여진 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크게 공감했던 게, 제가 개인적인 취향을 떠나 시각적으로 좋아하게 되는 작업들의 공통점이 바로 ‘자연 재료 자체를 존중하면서 작가가 딱 필요한 만큼만 개입하는 태도’였거든요. ‘아, 내가 저 태도를 좋아했구나’ 깨달았던거 같아요.
제 작업도 땅에 직접 가서 캐스팅을 떠내는 방식이다 보니, 흙이나 이물질이 묻고 박히는 게 필연적이잖아요. 처음에는 비닐 같은 얇은 막을 깔고 순수하게 굴곡과 형태만 떠내는 게 물질을 존중하는 더 알맞은 태도가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었고요.
지음 (43:47)
…아, 질문이 뭐였죠?
여진 (43:48)
이번에 왜 눕히지 않고 세웠는지요.
지음 (43:52)
맞아요, 왜 세웠는지였죠. 막상 바닥에 눕혀놓고 보니 제3자 입장에서는 ‘이게 훨씬 더 간척지 같고 땅처럼 직관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을 저도 분명히 알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애초에 품었던 ‘수직으로 세운다’는 기념비적 맥락과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다시 세우는 쪽을 택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여전히 고민을 하고 있어요. 벽에 완전히 부착해 걸어볼까도 생각했고, 이번 모크캠프에서는 특히 현장에서 여러 설치를 유연하게 실험해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현장의 시각적 느낌에만 휩쓸려 즉흥적으로 결정하기보다는, 제가 원래 작업에서 전하고자 했던 본래의 맥락을 단단하게 지키는 게 맞겠다는 생각에 단체전에서는 다시 세우게 되었습니다.
주연 (45:42)
규모감이나 수량에 대한 선택도 궁금해요. 조각들이 이렇게 떨어져 배치되어 있는데, 짝꿍인 상희 님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 건지, 아니면 이 공간에 놓인 다른 모든 요소와 호응하며 내린 선택인지, 혹은 작업 자체의 고유한 맥락에서 비롯된 건지요.
지음 (46:23)
이번 두 번째 단체 설치에서는 제 작업이 다른 분들 작업에 비해 크기가 가장 작고, 한 피스만 둘 수도 있고 여러 개로 늘릴 수도 있는 유동적인 구조였어요. 특정 주제로 꽉 짜인 전시가 아니다 보니 부피감이 큰 다른 작업들이 먼저 자리를 잡아야 제가 판단을 내릴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작업들의 위치가 픽스되기를 기다렸다가 배치했어요. 짝꿍과의 2인 관계성만 고려하기보다는, 8명 전체의 배치가 이루어졌을 때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균형점을 찾아 조율한 선택이었습니다.
주연 (47:51)
인덱스 작업 과정도 궁금해요!
지음 (47:54)
인덱스요?
주연 (48:00)
네, 두 분이 인덱스를 어떤 방식으로 정리했는지요.
지음 (48:03)
처음에는 사전 정보를 거의 공유하지 않은 상태로 시작했어요. 각자의 기준에서 ‘중간 크기, 작은 크기, 큰 크기’ 이렇게 세 피스씩 가져오자는 수량만 맞춘 정도였죠. 그러다 “정보를 조금 더 나눠도 되지 않을까?”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미 제 개인 설치를 상희 님이 보신 상태였기 때문에 일부러 더 깊이 캐묻지 않고 하나씩 대화를 나누며 맞춰나갔어요.
지음 (49:11)
저는 이 작업을 뜰 때 ‘과거의 흔적을 내가 기억하고 기록한다’는 태도가 가장 명확한 중심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끊임없이 흐르고 소멸하는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 물질로 붙잡아두는 작업인데, 상희 님이 제 작업을 보면서 ‘시간’의 개념을 짚어주신 덕분에 작업을 다른 시야로도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하정 님도 “왜 이렇게 작은 크기로 작업했는지에 대한 선택의 이유가 있느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는데요. 현장에 직접 장비를 들고 가서 작업해야 하는 현실적인 제약도 있었고, 반죽이 굳는 속도와 시간, 그리고 수직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조형적 조건을 고려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출된 크기였어요. 너무 단단하지 않게 묽은 농도로 맞추다 보니 그 크기가 가장 안정적이었던 거죠. 다만 “스케일을 훨씬 더 거대하게 확장했을 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 강렬해지지 않겠느냐”는 피드백도 받아서 그 부분도 계속 고민하고 있어요.
주연 (51:29)
예전에 돌 위에 점토를 얇게 덧붙였다가 떼어내는 작업을 하셨잖아요. 돌을 빼내어 안쪽이 텅 비어 있는데, 마치 무언가가 존재했던 얇은 허물이나 반투명한 막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그 점토로도 땅을 떠내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신 적이 있을까요?
지음 (52:17)
재료를 결정하기까지 고민이 길었어요. 점토로 땅을 떠보거나 바위에 붙였다 떼어내는 실험을 했을 때, 어떤 대상을 감싸 안았다가 분리된 ‘껍질의 상태’는 아주 잘 드러났어요. 하지만 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드러나야 하는 건 대상의 세밀한 흔적과 질감이 있는 그대로 살아남는 것이었거든요. 점토는 건조되면서 심하게 수축하다 보니 디테일한 흔적이 다 뭉개지고 사라져 버리더라고요.
그래서 형태를 붙잡아둘 최소한의 단단함이 필요했어요. 그렇다고 석고만 100% 쓰기에는 재료가 너무 딱딱하고 공격적인 느낌이라, 유연하고 수용적인 물성을 섞어보고 싶었죠. 그런데 막상 결과물을 떠내고 나니 겉보기에는 석고의 인상이 너무 강하게 드러나서, 재료의 배합 비율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주연 (53:58)
결론적으로 순수하게 석고만 쓴 건 아니잖아요. 캡션에 적힌 재료에서 그 조율의 맥락이 드러나고 수용적인 특성을 담기 위한 선택들이 그 안에 녹아들어 있다면, 어쩌면 겉보기에 석고처럼 보인다는 점은 문제가 아닐 수도 있는 거 같아요.
여진 (54:31)
‘수용적인 재료’라는 표현을 쓰는 분들을 종종 봤는데, 지음 님 스스로는 그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지음 (54:45)
간척지를 매립할 때 쏟아붓는 시멘트와 거친 토사는 본래의 땅을 짓누르고 지워버리는 폭력적인 성질을 지녔다고 느꼈어요. 굳어버리면 한없이 단단하고 매끄러운 바닥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런데 그 견고하게 굳은 땅을 뚫고, 바다의 염분을 머금은 작고 연약한 염생식물들이 기어이 비집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간척지가 만들어진 폭력적인 구조를 답습하기보다, 그와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는 부드럽고 유연한 ‘수용적인 태도’를 찾고 싶었어요. 저에게 ‘덮는다’는 행위는 무언가를 짓밟는 폭력이 아니라, 어린 시절 어머니나 할머니가 자고 있는 제게 이불을 폭 덮어주던 것처럼 ‘돌봄’의 기억이었거든요.
영상 작업에서 천으로 땅을 덮는 행위도 처음에는 천 자체를 작업으로 제시하려 했지만, 결국 그 땅에 제 손이 닿고, 자라나는 여린 식물들을 조심스레 피하며 대상을 어루만지고 보살피는 신체적 감각 자체가 제 작업의 본질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대상을 억누르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태도, 그것이 제가 말하는 ‘수용적인 재료’로 이어진 것 같아요.
여진 (57:54)
그럼 물에 녹아드는 수용성(水溶性)과 대상을 포용하는 수용성(受容性)이라는 두 의미가 다 겹쳐 있는 거네요?
지음 (58:06)
제가 생각한 수용적인 태도는 땅의 상태와 흔적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내어 기억하는 성질에 가까워요.
여진 (58:25)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제야 온전히 이해가 돼요. 왜 덩어리를 하나로 만들지 않고 깨진 틈새를 두었는지 알겠네요. 그 균열과 틈이 있어야만 아래에서 무언가 뚫고 올라와 자라날 수 있으니까요.
지음 (58:38)
사실 제가 의도적으로 깨뜨린 건 아니었어요. 물을 듬뿍 넣어 묽게 반죽을 만들다 보니, 완전히 굳은 뒤에도 완벽히 결속된 상태가 아니라서 틀에서 떼어낼 때 박혀 있던 돌이나 흙의 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스스로 갈라지고 쪼개진 거였죠. 석고만 썼을 때는 네모 반듯한 틀 그대로 매끈하게 나왔지만, 흙과 반죽을 섞으니 스스로 틈을 벌리며 분리되더라고요. 매끄러운 매립지의 표면을 뚫고 나오는 그 생명력의 틈새처럼 읽어주신 것도 맞닿아 있어요.
여진 (01:00:01)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작업을 바닥에 눕히지 않고 수직으로 세워야 한다는 의지가 더 강했던 거잖아요. 매립지라는 텍스트를 접하면 바닥에 눕혀져 있는 상태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도 굳이 세우고자 했던 내면의 이유가 궁금해요.
지음 (01:00:44)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첫째는 매립된 땅 위에서 틈을 뚫고 자라나는 식물들이 모두 수직을 향해 꼿꼿이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 작업을 만들어 두고 보니 저에게 소중한 물질이 되어버렸다는 점이에요.
단순히 제 개인의 애착을 넘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대상들을 기록하기 위해 떠낸 흔적이잖아요. 관람객들이 위에서 아래로 무심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니라, 작품 앞에 가까이 다가와 스스로 몸을 낮추고 눈높이를 맞추며 마주하기를 바랐어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존재와 동등하게 눈을 맞추는 조형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연 (01:03:01)
이번에 영상을 다시 재편집해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궁금해요.
지음 (01:03:12)
내년까지는 간척지에 대한 작업을 더 깊이 파고들 생각이에요. 간척지라는 장소에 도달하기 이전에 제 내면의 상태가 먼저 존재했고, 그 경험과 감정의 시선이 간척지로 향했던 것인데 지금까지는 그 내적인 흐름이 잘 드러나지 않고 단순한 ‘지역 리서치 작업’처럼 보이는 한계가 있었어요.
글과 내면의 호흡을 영상 언어로 풀어내고 싶어요. 제가 겪었던 개인적 사건들을 간척지와 작위적으로 엮기보다는, 결국 ‘사라져 가는 것들, 지금 우리기 보아야 하지만, 보고 있지 않은 것들은 무엇인지’를 고민해보면서 엮어보고 싶습니다.
여진 (01:04:26)
제가 가창오리를 좋아해서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 든 책이 하나 있어요. 가창오리 서식지와 갯벌이 인간의 무분별한 매립과 개발로 파괴되면서 개체 수가 줄어드는 과정을 다룬 책이었는데, 서술 방식이 정말 인상 깊었어요. 격정적으로 분노하거나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오직 객관적인 사실과 수치로만 덤덤하게 써 내려가거든요.
예를 들어 “금강 하구에서 유입되는 수량이 얼마였는데 현재 몇으로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날아드는 가창오리의 개체 수가 몇 마리에서 몇 마리로 급감했다”는 식으로 건조하게 기록하는데, 오히려 그 담담한 수치를 읽는 독자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버린 생명들에 대한 상실감이 더 깊게 요동치더라고요. 자신의 감정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독자에게 그 깊은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훌륭한 방식이었어요. 지은 님이 간척지를 다루실 때도 이런 서술 방식을 참고해 보시면 큰 힌트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지음 (01:07:12)
제가 지향하는 방식도 그거예요. 간척지에 대해 말하면서도 제 개인적인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하지 않고, 관람자가 스스로 그 사라짐의 감각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요. 그래서 관객이 자꾸 몸을 숙이고 작은 흔적에 밀착하게 만드는 설치를 시도했던 것 같아요. 그 책 사서 읽어볼게요…
주연 (01:07:56)
겪었던 사건을 직접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감각적으로 스며들게 만드는 게 지음님이 도달하고 싶은 지점일 수 있겠네요.
지음 (01:08:20)
네. 전시에 놓인 글은 당시 제가 느꼈던 고통과 감정을 날것 그대로 쏟아내듯 쓴 글이라 무척 직접적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너무 추상적이고 결론이 없으며 모호한 감정만 맴돈다”는 피드백을 받기도 했죠. 명확한 메시지와 모호한 정서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게 제 숙제예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한강 작가의 소설 『흰』인데, 시와 소설의 경계에 있는 그 짧은 문장들을 읽을 때 밀려오는 정서 같은 것을 제 시각 언어로 구현하고 싶어요. 조각일 수도, 영상일 수도 있겠지만 간척지의 풍경과 제 내면의 시선을 담아내는 데는 영상이 또 다른 힘을 가질 수 있겠다고 생각해요.
여진 (01:10:24)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소멸의 시작》 전시도 생각나네요. 작가가 매일매일의 풍향과 바람의 세기, 날씨를 일지 형태로 기록해 둔 작업이 있었는데, 문체 자체는 담담한 관찰 일지였지만 관람객들은 그 건조한 기록 속에서 작가의 내밀한 정서와 감정을 오롯이 읽어내더라고요.
주연 (01:10:52)
일지라는 형식이 지음님에게 잘 맞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매일 그 땅을 오가며 피부로 부딪쳤던 미세한 감각들을 차곡차곡 축적하는 기록이요.
지음 (01:12:17)
작년에 개인전을 준비할 때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갑작스럽게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있었어요.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았던 친구였기에 그 충격이 너무 컸고, 그 상실감이 전시에 깊게 투영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 이후 매주 간척지를 답사할 때도 그 친구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어요.
그런 상실의 비극을 연이어 겪으면서, 그 내밀한 고통을 작업에 직접 끌어올 수는 없으니 제 심상이 향한 대상이 바로 간척지였던 거예요. 수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거대한 개발도시 가운데에,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버려진 공터와 살아남은 생명들이 있잖아요. 친구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 버려진 땅의 풍경과 완전히 겹쳐졌던 것 같아요. 앞으로 영상을 다루게 된다면 고독하게 살아가는 독거노인의 삶이나, 우리가 미처 바라보지 못하고 놓쳐버린 소외된 존재들을 응시하는 작업으로 확장해 나가고 싶습니다.
주연 (01:15:14)
이야기를 듣다 보니 캐스팅 재료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각이 들어요. 비가 내리면 흔적도 없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녹아버리는 수용성(물에 녹는 성질) 재료로 캐스팅을 떠보는 건 어떨까요? 콘크리트처럼 물이 차올라도 꼼짝하지 않는 영구적인 매립이 폭력적이라면, 단단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물이 닿으면 자연스럽게 녹아 사라지는 재료를 쓴다면 지음님이 말하는 사라짐과 연약함의 맥락이 훨씬 더 직관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으니까요.
주연 (01:16:21)
이를테면 물에 녹아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비누처럼, 물질 자체가 지닌 유한성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진 (01:16:52)
저는 슬라임도 떠올랐어요. 처음엔 뭉쳐져서 형태를 유지하다가 시간이 흐르면 스르륵 바닥으로 퍼져나가며 형태가 무너지는 물질이잖아요.
지음 (01:17:25)
재료에 대한 고민을 더 넓혀봐야겠네요. 제가 의도했던 수용성의 의미가 관람객에게 어떻게 감각되는지 다시 점검해 보게 돼요.
주연 (01:17:36)
‘수용’이라는 단어가 주는 확장성에 대해 이야기해 본 것이고 의도에 맞지 않다면 넘겨주세요!
(잠시 장내 정리 및 이동 후)
지음 (01:19:43)
주연 님 설치 공간에 대해 이야기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어두운 방이나 지하 공간으로 들어가는 듯한 아늑함이 있어서 영상과 공간이 어우러진다고 느꼈어요. 원래 바닥이었던 구조물을 천장으로 들어 올려 배치하셨잖아요.
주연 (01:20:16)
맞아요. 늘 바닥재로만 쓰던 것을 이번에는 천장으로 전환해 보고 싶었어요. 빛을 가려주는 가벽의 높이에 딱 맞출지, 아니면 누웠을 때 천장이 코앞에 닿는 관(coffin) 같은 높이로 할지, 혹은 다락방이나 반지하 방 같은 좁지만 아늑한 느낌으로 할지 고민이 많았죠.
결국 틈새로 비쳐 들어오는 빛의 양과 질감이 영상과 겹쳐지는 지금이 가장 적절하다고 느꼈어요. 너무 어두운 것보다도 아침에 해가 떳지만 창문을 열지 않아서 어둑한, 빛이 새어들어오는 정도의 조도인 점도 좋았어요.
그리고 폭이 좁고 긴 창고라는 공간을 활용하면서 영상까지 다가가는 깊이감에 대한 고민도 계속 했어요. 지금보다 천장을 두배로 확장해서 설치를 했었는데 굴을 건너듯 깊고 어두운 공간 끝에 영상이 있는 것이 좋았지만, 관람객이 멀리서만 영상을 보고 가더라구요. 관람객이 이 공간 안에 약간 망설이면서 들어와서 결국 바닥에 앉아 영상을 보는 시간을 갖도록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창고 끝 가로 115cm, 세로 폭 140cm인 바닥 사이즈에 맞춰서 천장 길이를 조절했어요.
지음 (01:22:57)
주연 님이 이번에 영상 작업을 발전시키면서 편집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하셨잖아요. 장면의 배치와 자막 텍스트가 어떤 타이밍에 결합하느냐에 따라 전달되는 뉘앙스가 완전히 달라지니까요.
그런데 항상 영상과 함께 이런 물리적인 구조물 설치를 병행하고 계시잖아요.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효과나 공간이 자아내는 고유한 분위기가, 영상에 하나의 시각적 레이어를 더해주는 역할을 하길 바라시는 건가요? 아니면 관람객을 영상 속으로 몰입시키기 위한 유도 장치로 보시는 건가요?
주연 (01:24:21)
단순한 유도 수단이라기보다는, 영상을 온전히 감각할 수 있는 ‘환경’ 자체를 조성하는 쪽에 가까워요. 저는 이번에 계속 모니터보다는 빔 프로젝터의 빛을 통해 영상이 공간에 스며들기를 원했어요. 관람객이 화면 밖에서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물리적 공간의 안쪽으로 들어와 있다’는 신체적 감각을 느끼길 바라요. 그 공간 안에서 영상의 서사를 온몸으로 흡수하길 원하고요.
이전 크리틱에서 텐트 구조물이 너무 직접적으로 제시되었다는 피드백을 받았는데 깊이 공감했어요. 옥상에 텐트를 치고 어머니와 실뜨개를 했던 그 공기의 온도와 빛의 오묘한 감각을 전시장에 가지고 오고 싶었던 것이었는데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텐트라는 실물을 직접 가져오지 않고도 ‘여기가 방금 전에 서있던 전시장과는 다른 내부에 들어와 있다’는 감각을 환기하는 구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지음 (01:27:16)
실제 모니터가 아닌 프로젝션의 빛을 사용하고, 틈새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환경을 보면서 ‘빛’ 자체가 주연님의 중요한 의도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영상 속에서도 어스름한 어둠이 깔릴 때 저 멀리서 작은 불빛이 켜지는 장면이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거든요. 영상 속 메시지와 전시장의 공간 설치가 모두 ‘빛’이라는 매개를 한 번 더 통과하고 은유하는 구조로 읽혔어요.
주연 (01:28:20)
네, 맞아요. 어떤 막이나 유리를 통과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깊이감, 유리창에 흐릿하게 비친 어머니의 실루엣처럼 초점이 흩어졌다 다시 맺히는 순간의 감각들을 본능적으로 찾는 것 같아요.
이번 영상을 다시 돌이켜보면 상징이 되는 텐트나 실뜨기 자수 같은 여러 장면을 담을 때 카메라 시점에 대한 고민을 더 했으면 좋았을 거 같은데 그 점이 부족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이걸 제 안에서 정리하는 과정이 어려웠어요.
지음 (01:31:37)
그 텐트 치는 장면이나 스치는 움직임이 가장 직접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등장해서 물리적인 힘을 써 무언가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는 신체적 감각이 가장 강렬하게 와닿았거든요.
주연 (01:32:07)
그래서 사실 재편집을 시도해 봤는데 결국 실패했어요. 실뜨기하는 장면만 남기고 다 덜어내거나, 자막만 남기거나, 아니면 순수하게 손의 움직임만 남겨보는 식으로 세 가지 요소를 다 엮지 않고 단 하나의 숏만 남기면 어떨까 스스로 가정을 계속 던져봤거든요. 그런데 제 안에서 아직 그 구조가 설득력 있게 정리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번 영상 안에서는 그렇게 완전히 덜어내는 건 어렵겠다’고 판단했어요.
지음 (01:33:50)
처음에 영상을 구상하셨을 때의 그 ‘세 여성의 이야기’가 한 화면에 합쳐진 단채널이 아니라, 세 개의 채널로 분리되어 어머니의 이야기, 작가 자신의 이야기, 혹은 시장 사장님들의 이야기가 공간 안에 분리되어 설치되었을 때와, 지금처럼 하나로 합쳐져 편집되었을 때 주는 느낌이 전혀 다를 것 같아요. 각각의 소스를 어떻게 분리하고 묶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을 것 같아요.
여진 (01:34:36)
예전에 큐레이터님이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하는 영상을 언급하셨던 것 기억나요? 그날 저도 그 영상을 봤는데 참 인상적이었어요. 3채널로 쪼개지 않고 약 40분짜리 단일 채널로 쭉 이어지는 다큐멘터리 형식이었는데, 세 인물의 서사가 뚜렷하게 구분되면서도 흡입력이 대단했거든요.
여진 (01:35:25)
사진 작업과 연계된 영상이었는데, 독일에 계신 퀴어 여성의 이야기나 어떤 공간을 운영하는 사장님의 이야기처럼 각 인물의 삶을 담담하게 회고하듯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아냈더라고요. 마감 시간이라 끝까지 다 보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보고 싶을 만큼 몰입감이 높았어요. 언젠가 주연 님과도 그런 작업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었어요.
주연 (01:36:22)
이번 작업을 하면서 내가 대상에게 다가가는 깊이가 아직 부족했다고 생각해요. 평화시장 사장님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고 이야기를 듣고 곁에서 함께 자수를 놓던 시간은 정말 길었는데, 엄마와도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막상 인터뷰를 촬영하려니 이전에 나눴던 자연스러운 대화를 카메라 앞에서 다시 끌어내야 하잖아요. 내가 하려는 작업을 대상에게 설명하고 그걸 어떤 방식으로 요청하고 설득해야 할지 제 안에서 명확한 정리가 덜 되어 있었던 거 같아요.
다음 작업에서는 그 준비와 조율의 과정을 더 섬세하게 준비해보고 싶어요.
주연 (01:38:18)
한편으로는 대상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너무 직접적으로 노출하지 않는 방식을 고민하게도 돼요. 카메라 테크닉이나 앵글, 프레임을 신경 쓰느라 정작 그 사람의 감정과 호흡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할까 봐 조마조마했어요. 제 촬영이 일터 현장에 방해가 되거나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까 봐 소극적이어지더라구요. 그래도 이번에 직접 부딪쳐 보며 좋은 경험을 한 셈이죠.
지음 (01:40:01)
주연 님의 마음속에 다큐멘터리적인 지점을 좇고 싶은 마음이 더 큰지, 아니면 영화처럼 설계된 연출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지 그 지향점이 궁금해요.
주연 (01:40:19)
이번 작업을 만들며 깨달은 건, 저는 본능적으로 시적인 상징과 은유가 담긴 장면을 설계하고 연출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점이었어요. 그러면서도 인물들의 실제 삶을 포착하고 싶다는 마음이 공존했던 거죠. 다음 작업에서는 다큐멘터리에 준하는 치열한 사전 리서치와 인물들과의 깊은 교감을 바탕으로, 그 내용을 제가 연출한 영상 언어로 녹여내는 방식을 취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직은 명확하게 확답을 내릴 순 없지만요.
지음 (01:43:22)
제가 이해한 바로는, 다큐멘터리는 작가의 자의적인 개입을 최소화하고 대상이 지닌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태도라면, 연출은 작가의 자아와 의도, 개입이 전면에 드러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완전히 다른 태도인 거죠. 다큐멘터리를 지향한다면 시적인 언어나 모호한 비유는 덜어내야 할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주연 님이 지금까지 미술을 해오며 견지해 온 언어는 바로 그런 시적인 은유와 비유 자체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주연 (01:45:32)
아까 언급되었던 가창오리 이야기처럼, 작가가 직접 맥락을 설명해 주지 않으면 관람객은 한 번에 다 이해하지 못하는 층위들이 분명 있잖아요. 저는 관람객이 그 틈새에서 스스로 상상할 수 있는 문학적 여백을 열어두고 싶어요.
그런 면에서 평화시장 사장님의 손을 클로즈업한 장면도, 과연 순수한 다큐적 시선이었을까 자문해 보면 결국 제 주관적인 연출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리서치 단계에서의 진행한 인터뷰나 글을 전부 작업에 들어오게 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많은 부분을 덜어내고 결국 ‘제일평화’라는 장소가 가진 역사적 맥락과 제가 거미에 비유하는 ‘집과 몸’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서 어떤 끝없이 노동하는 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편집을 하다보니 마지막에는 평화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지워졌는데 평화시장 사장님들의 개개인의 노동과 시장의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마음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도 고민해야겠어요.
지음 (01:47:59)
안규철 선생님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안규철 선생님의 작업은 매우 시적이고 은유적인 언어로 중요한 메시지를 건네잖아요. 저는 그 시적인 방식에 엄청난 힘이 있다고 느껴요. 저는 미술을 처음 접했을 때 안규철 선생님의 그 시적인 태도로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점에서 깊은 울림을 받았거든요.
주연 (01:49:22)
어떤 맥락의 이야기인지 너무 잘 이해돼요.
지음 (01:51:05)
이번 첫 영상을 보았을 때 저는 분명 연출적인 쪽에 훨씬 더 가깝다고 느꼈어요. 언니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내밀한 서사가 담겨 있으니까요.
여진 (01:51:30)
영상이라는 매체를 떼어놓고 언니의 기존 회화 작업만 보더라도, 전부 시적인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차 있잖아. 타고난 작업적 기질 자체가 그런 사람인 거야.
주연 (01:51:38)
맞아..
지음 (01:52:29)
설치 작업이나 다루시는 빛, 그리고 언니가 쓰시는 글의 결을 보면 늘 무언가를 시적으로 치환하고 은유하는 태도가 일관되게 흐르고 있어요.
주연 (01:52:54)
저는 왜 이렇게 틈새로 비치는 빛이 좋을까요. 결국 대상을 응시하는 시선에서 출발하지만, 그 상징 안에 세상의 이야기를 압축해 담아내고 싶어 하는 강렬한 욕망이 제 안에 늘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다만 앞으로는 좀 더 뾰족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어요.
주연 (01:54:27)
콘티를 기획하고 어떤 순차적인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의 모든 파편을 일단 성실하게 수집하고 기록한 뒤 그것을 엮어내며 형태를 찾아가는 제 방식도 존중하면서 두 방식을 잘 병행해 봐야겠어요.
주연 (01:55:00)
헉 시간이 벌써 이렇게.. 녹음이 아주 알차게 잘 됐네요. (웃음) 다들 개인 설치가 무사히 끝나서 그런지 얼굴에 안도감이 묻어나요. 이제 녹음은 마무리 할까요?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검색